꽃잎의 말로 편지를 쓴다 : 문학집배원 도종환의 시배달
도종환 저 | 창비 | 2007년 05월

엊그제 읽은 시집보다 마음에 살짝 와닿아 흔들리게 하는 시 몇편이 더 있는 시집. 그 중에서 가장 좋은 시나 문구를 발췌해둔다.

 

처음 가는 길 - 도종환

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
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.
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
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.
두려워 마라 두려워하였지만
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
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
자기 전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

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
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

 

한계령을 위한 연가 - 문정희

한겨울 못 잊을 하고
한계령쯤을 넘다가
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.
뉴스는 다투어 수십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
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
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
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.

오오, 눈부신 고립
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
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.
.......
(중략)

 

 

오분간 - 나희덕

이 꽃그늘 아래서
내 일생이 다 지나갈 것 같다.
기다리면서 서성거리면서
아니, 이미 다 지나갔을지도 모른다.
아이를 기다리는 오분간
아카시아꽃 하얗게 흩날리는
이 그늘 아래서
어느새 나는 머리 희끗한 노파가 되고,
버스가 저 모퉁이를 돌아서
내 앞에 멈추면
여섯살배기가 뛰어내려 안기는 게 아니라
훤칠한 청년 하나 내게로 걸어올 것만 같다.
내가 늙은 만큼 그는 자라서
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보겠지
.
기다림 하나로도 깜박 지나가버릴 생(生),
내가 늘 기다렸던 이 자리에
그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쯤
너무 멀리 나가버린 그의 썰물을 향해
떨어지는 꽃잎,
또는 지나치는 버스를 향해
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내 기다림을 완성하겠지.
중얼거리는 동안 꽃잎은 한 무더기 또 진다.
아, 저기 버스가 온다.
나는 훌쩍 날아올라 꽃그늘을 벗어난다.

 

그 중에서 오분간이 가장 좋았다.

Posted by 랄라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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